자생한방병원 설립자 신준식 박사의 선친, ‘청파 신광렬 선생’(이명 신호, 신현표)은 의사이면서 한의사이자 독립운동가로, 2022년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습니다.
신광렬 선생은 조선 독립과 민족의학으로서 한의학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평생 아픈 이들의 몸과 마음을 내 가족처럼 아끼고 보살피는 '긍휼지심(矜恤之心)'을 강조했습니다.
주요 업적
- 1930년 간도 용정의 3·1운동 11주년 기념 항일시위운동 참여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 (수형번호 1679)
- 집안의 독립운동을 기록한 자신과 집안의 일대기
<월남유서> 집필 - 자생한방병원 비수술 치료법의 바탕이 된
<청파험방요결> 집필 - 2022년 독립유공자 서훈
생애
청파 신광렬 선생은 1903년 2월 13일 함경남도 북청군 중평면 동상리 출신으로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선생의 집안은 대대로 북청에서 한의업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였으며 20여 두락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이후, 대진단 단장이자 군의관으로 활동한 이숙 *신홍균 선생의 영향으로 집안의 모든 가족이 북청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봉천성 장백현 17도구 왕가동 삼포리로 이주하였습니다.
청파 신광렬 선생은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 때 탄압을 받으면서 자랐고, 1919년에는 삼촌인 신동균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 헌병대에 잡혀 피살되어 압록강에 수장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 이명 신흘申屹, 신굴申矻
- 1881. 함경남도 북청군 출생
- 1911.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이주. 가업인 의술을 펼치며 현지 한인들을 돌봄
- 1920. 독립운동가 김중건과 함께 독립군 대진단 창설. 계몽운동을 통한 독립운동가 양성에 힘씀
-
1933. 한국독립군에 합류하여 지청천, 조경한 등과 함께 항일 무장투쟁 활동 전개
3월. 사도하자 전투 참여·승리
6월. 동경성 전투 참여·승리
7월. 독립군 3대 대첩 중 하나인 대전자령 전투를 대승으로 이끔 - 1934. 한국독립군 지휘관으로 활동
- 1935~1941. 영안, 목릉, 밀산 등 북만주 지역에서 항일 무장투쟁 지속
- 2020. 건국훈장 애족장 서훈
신홍균 선생은 3대 독립군 대첩 중 하나인 '대전자령 전투(1933)'에 참전했습니다. 당시 독립군은 이곳을 지나는 일본군을 급습하기 위해 잠복했는데, 예상치 못한 폭우로 일본군이 일정을 지체하면서 3일 동안 산 속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떨며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때 군의관이었던 신홍균 선생이 한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매복지 주변에서 '검은 버섯(목이버섯)'을 채취해 식량으로 쓰는 기지를 발휘하였고, 지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독립군이 기운을 차리고 대승을 이끄는 데 일조했습니다. 이러한 일화는 당시 전투에 함께 했던 백강 조경한 선생(독립운동가, 임시정부 국무위원)의 회고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22세에 동흥중학교를 졸업한 청파 신광렬 선생은 이후 1년간 관립 중국 장백현 제일 정몽학교 훈도(교원)로 부임하였습니다. 선생이 재직할 당시 정몽학교는 독립운동단체 광정단 간부 출신 오주환이 교장을 맡는 등 독립군 단체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때였습니다. 신광렬 선생은 이 시기 몇 년 전부터 사립의원에 다니면서 의사 시험을 준비했는데, 일제로부터 독립운동 가문이라는 요시찰 집안으로 지목되어 의사 시험을 보려고 신청을 해도 수험표도 받지 못하는 탄압을 수 차례 겪었습니다.
3‧1운동 11주년을 맞아 광주에서 시작된 광주학생운동이 국내뿐 아니라 만주와 간도지역까지 확산되자 청파 신광렬 선생은 학생들과 만세시위에 나섰습니다. 이때 선생은 일본총영사관 기병대 경찰이 휘두른 군도에 맞아 옆구리에 30cm가 넘는 자상을 입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신광렬 선생은 1930년 4월 혜산진에서 경찰에 검거되었고, 한 달 뒤 서울로 호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습니다. (수형번호 1679)
석방 후 청파 신광렬 선생은 서간도 임강현 모아산 현립의사강습소에서 공부하여 의사 시험에 합격한 후 광생의원을 열고 8년 동안 운영했습니다. 이후 이숙 신홍균 선생이 머물고 있던 목단강 외동구 동승촌으로 넘어가 의업과 농사를 병행하며 독립군의 군수품을 전달하는 등 항일투쟁을 지원했습니다.
청파 신광렬 선생은 해방 후 사회주의에 반발하여 월남한 후 신익희 선생과 함께 구국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북한에 파견된 신광렬 선생은 보안대원에게 발각되어 강제 연행될 위기에 처했으나 가까스로 도망쳤고, 가족들을 북에 남겨둔 채 남한으로 탈출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미국중앙정보부(CIA) 보고서를 통해 확인되었습니다.
남한에 돌아온 청파 신광렬 선생은 본업인 의업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얼마 뒤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피난을 떠났고, 충남 당진군 우강면 남원포로 내려가 다시 광생의원을 열었습니다.
전쟁 이후, 선생은 일제에 의해 말살되어 잊혀져 가던 한의학을 되살리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고 한의사 시험에 합격한 뒤 1957년 충남 아산시 도고역 앞에 청파한의원을 개원했습니다. 그리고 의료시설이 낙후된 농어촌에서 17번이나 이사를 다니며 환자들을 돌봤습니다.
청파 신광렬 선생은 과거 자신의 구국 활동으로 인해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이 고문과 고초를 당하다 죽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듣게 됩니다. 이때 큰 슬픔에 빠진 선생이 생을 마감하려 쓴 유서가 <월남유서>입니다. 자신과 가족의 일대기가 담겨 있으며 집안의 독립운동 이야기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북에 두고 온 가족을 잃은 슬픔과 죄책감으로 죽을 결심을 했던 청파 신광렬 선생은 어린 아들(신준식 박사)을 보며 마음을 되돌렸습니다. 그리고 의사이자 한의사인 본인의 의술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한의학을 발전시키고자 흩어져 있던 집안 비방을 모아 <청파험방요결>을 집필하였습니다. 이는 훗날 아들인 신준식 박사(자생한방병원 설립자)가 비수술 척추 치료법을 개발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청파 신광렬 선생은 계단에서 구르는 사고로 척추를 다치면서 6여년 간 자리에 누워 생활해야 했습니다. 고통스러운 투병생활 중에도 선생은 자신을 찾아온 환자들을 진료하며 1980년 작고할 때까지 의료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습니다.
평생 약자에 대한 연민과 아픈 이들의 몸과 마음을 내 가족처럼 아끼고 보살피는 긍휼지심(矜恤之心)을 강조한 신광렬 선생은 아들 신준식 박사에게 유지로 한의업을 잇게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