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공자 보훈 사업

태극기 이미지 - 자생의료재단

한족회 중앙위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박건선생의 손부 윤영자님

등록일
2019.09.26
조회수
2,445

배고픔의 고통보다 큰 건.. 나라를 잃는 고통이다. 시할아버지, 시아버지의 독립운동 정신으로 살아왔습니다. - 자생의료재단
 

박건 독립운동가의 손부인 윤영자어머니는 독립운동을 하는 집안에 시집와 50평생을 독립운동정신으로 살아왔다고 합니다.
그 독립운동 정신은 바로 “배고픔의 고통보다 나라를 잃는 고통이 더 크다” 였습니다.

 

독립운동가 박건선생은 일제강점기 한족회 중앙위원으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셨습니다.
1913년 10월 만주 통화현 김두하락에서 독립운동단체 경학사의 후신인 부민단을 발전시켰습니다. 

1920년 5월 경 박건선생은 독립운동 하다 일본경찰에 붙잡혀 사형이 확정되기도 했지만 형장으로 압송 도중, 독립운동가 김자선과 동생 박세진, 박명진 등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얼마 뒤 독립운동을 하다 숨을 거두셨습니다. 

 

박건선생의 묘 - 자생의료재단 

 

시아버지 박진수님 역시, 아버지인 박건선생을 따라 독립운동을 했지만 일본군에 의해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더 억울한 건 독립운동을 했다는 집안의 후손 이라는 이유로 직업도 얻을 수 없었던 남편이었는데요. 윤영자어머니가 남편을 대신해 한 집안의 가장으로 지금까지 평생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독립운동 정신으로 살다 보니 제 인생에도 이런 행복한 순간이 오네요…”

 

진료받는 모습 - 자생의료재단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고 있을 때 삶을 놓아버리고 싶었던 순간도 여러 번이셨다는 윤영자 어머님… 힘들 때 마다 자신을 일으켜 세운 건 바로 ‘독립운동 정신으로 살자!’ 라는 깊은 다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악물고 버티며 평생을 살다보니 윤영자 할머니의 몸 상태는 허리를 펼 수 없을정도로 통증에 시달리셨고 허리는 ‘ㄱ’ 자로 굽은 상태였는데요. 집 근처 병원에서 허리 치료을 받을 때 마다 늘 수술 권유를 받곤 했지만 수술 할 정도의 경제적 여유도 없었고 통증 역시 생활의 일 부분이다 라고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목동자생한방병원 병원장 정벌(왼쪽), 윤영자 어머니(오른쪽) - 자생의료재단

고통스럽게 통증을 참아온 지금 윤영자 어머니는 목동 자생한방병원에서 3개월 간 약침과 침 치료를 받고 있으며 틀어진 골반을 바로 잡는 추나요법과 함께 한약치료가 병행됐습니다. 


자생의료재단의 독립유공자유족지원을 통해 3개월간 척추관협착증 치료를 받게 된 것이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시할아버지 박건 선생님의 마지막 선물과도 같다고 합니다. 

 

자생의료재단

독립운동가 박건 (1880년~1943년) - 운동계열 : 임시정부 / - 포상정보 :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 추서 / - 공적개요 : 상해 임정의 국내조사원으로 경북 의성지방에서 조사활동을 하였으며 재만독립촉성회를 결성하는데 북만대표로 활동함 / 자생의료재단·자생한방병원은 독립유공자와 유족 의료지원을 통해 독립운동 정신 계승에 앞장서고 있으며, 독립운동가 박건 선생의 손부 윤영자님의 건강은 목동자생한방병원 정벌 병원장님이 보살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