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을 꿈꿨던 독립운동가 이용식 선생의 동생 이용희님
- 등록일
- 2019.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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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이용식 선생님의 동생 이용희님은 언제나 자신의 형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암울한 시대상 속에서도 “말과 역사가 없어지면 국가도 사라지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사라져가는 민족의식을 지켜낸 영웅이기 때문입니다.
전북 남원에서 부잣집 도련님으로 태어난 이용식 선생님은 누구보다 이상을 그리는 독립유공자였습니다. 학생 시절부터 조선어학회의 편찬위원으로서 암암리에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그는 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한글과 국사를 가르쳤습니다. 일제강점기 말기 한국말을 사용하는 것조차 금기시하던 시기에 한글과 국사를 교육한다는 것은 그 당시로는 깜짝 놀랄 만한 일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교사직에서 해임 당했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 만의 독립운동을 이어나갑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불과 18살의 일입니다.
이후 이용식 선생님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도 점조직 형태의 독립운동을 진행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나갑니다. 고향에 돌아와 강의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압제에 무력으로 대항하기보다 민족정신을 모두에게 뿌리내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유학생들과 한글, 역사 연구를 지속해나가던 그는 비밀 서신교환이 일본 경찰에게 발각돼 징역을 선고 받고 전주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게 됩니다.
형무소에서의 생활은 가혹했습니다. 학자로서의 활동했기 때문에 사상범으로 취급돼 일반 수감자들보다 가혹한 고문이 가해졌다고 합니다. 이용식 선생님의 몸은 급속도로 약해졌고 석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46년 7월 25일에 돌아가시고 맙니다.
남은 가족들은 슬프고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이용식 선생님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면서 집안의 땅이며 귀중품들을 모두 처분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부유했던 가세가 기울어 동생 이용희님의 경우 의대에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돈이 모자라 의사의 꿈을 접어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이용희님은 가족들과 살기 위해 군에 입대하는 등 여러 가지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어렵사리 생계를 유지하다 얻은 급성 뇌졸중으로 인해 지금은 몸도 편치 않지만 그래도 이용희님은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되려 미래 세대에게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마음만 가지면 사람은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설령 그 사람이 못했다면 다음 사람에게도 이어질 수 있는 것이지요. 저는 최신 학문은 잘 모르지만 여기저기서 ‘미래지향적’이란 말을 자주 씁디다. 저는 독립운동 정신이란 게 미래지향적이어야 된다고 봐요. 사람은 변하더라도 그 본질만큼은 계속 이어져 내려가야 한다고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영원토록 변치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이용희님은 여든이 넘은 나이에 지금도 형님의 공로를 기리며 묘를 관리하고 매년 제사를 올린다고 합니다. 돈과 지원을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저 형님이 그토록 바랬던 이상을 누군가는 잊지 않고 계속 이어가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지요. 혼란스러웠던 사회상 속에서 온갖 핍박에도 굴하지 않았던 이용식 선생님. 그 분의 숭고한 희생은 앞으로 계속해서 기억에 남아 후손들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독립유공자 이용식(1923~1946) / - 운동계열 : 국내항일 / - 포상정보 : 2007년 건국포장 추서 / - 공적개요 : 1940년 전북 남원의 용성보통학교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조선어독본을 교육시키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다가 교사직에서 해임됨. / 이후 일본 유학 중에도 10여 명의 유학생 동지 등을 규합해 한글과 역사연구에 몰입하다 동지들과 교환하던 서신이 발각돼 체포됨. / 1944년 7월 전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및 육해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름. / 자생의료재단·자생한방병원은 독립유공자와 유족 의료지원을 통해 독립운동 정신 계승에 앞장서고 있으며, 독립유공자유족회에 기탁한 “신준식 생계비” 지원을 통해 조금이나마 고충을 덜어드리고자 합니다.”